근친 아닌 근친 - 단편

근친 아닌 근친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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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십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월남 파병 전우회니 고엽제 전우회니 하는 단체에 대하여 그다지 무관심 내지는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고엽제 피해자로 등록이 되고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요즘 그들 단체들의 하는 꼴은 목불인견 (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나 꼴불견)의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왜 우리 국군둘이 월남에 파벙이 되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는가?


왜 우리 국군들이 마군들보다도 더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을 하였는가?


여러분들은 이 두 가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은 간단합니다.


미국이라는 깡패에 가까운 나라가 자국의 이득을 위하여 제 삼의 국가 군인들을 끌어들여 총알받이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누구를 규탄하거나 타도를 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미 대사관 혹은 영사관 내지는 미국과 관련이 된 것에서 미국을 규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요?


자기네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미국의 국기를 들고 반미를 주장하는 단체들 앞에서 반미 단체를 타도하자고 외치거나 미국이 자기들을 살려준 나라라고 강변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뿐인가요?


월남파병의 한국 측 괴수인 박정희 독재자의 딸인 박00씨를 고엽제 전우회 및 파월장병 전우회 고문으로 위촉을 하고 있는 지경이니 이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다 쓰러질 코미디 중의 코미디가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육이오 때 우리나라를 도운 점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굵은 소금으로 밑간을 한 안남미로(인도차이나반도의 안남이란 곳에서 생산되는 쌀로서 찰기가 거의 없어 입으로 불면 날라 갈 정도라고 함)만든 주먹밥으로 도와주었다면 가져 간 것은 최고급 양식 그도 풀코스의 양식을 슬그머니 빼앗아갔습니다.




도움이란 배려나 마찬가지입니다.


배려라 함은 도움을 주고 어떤 대가를 바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도움을 주면서부터 이미 빼앗아 갈 만반의 준비를 모조리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소파 협정입니다.


빨갱이로부터 우리 국민을 지켜주고 돕는답시고 주둔지 땅을 무료로 그도 노른자위만 골라서 주둔시키고 주둔한 병사가 살인강도 도둑질에 강간을 하더라도 재판 관활 건은 자기들이 갖는 등 악의적인 것은 모조리 자기들이 유리하도록 만들어 두고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입니까?


그들은 세계적인 깡패입니다.


집안끼리 혹은 형제끼리 다투며 사는 것이 세상입니다.


또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사움은 말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하거나 자기들의 물건이나 정책을 사가거나 따르면 상대가 아무리 착하고 정당한 조직이라도 적으로 만들어버리고는 자기들의 정책에 따르는 놈들의 대리인이 되어서 총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모조리 그런 종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열세로 들어가면 자기들을 따르는 아니 따르도록 만들어버린 나라들에게 아니 속국 아닌 속국에게 파병을 하라고 하여 자기들 대신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속국 아닌 속국 중에 가장 불쌍한 속국이 바로 대한민군이란 땅덩어리에 사는 불쌍한 우리 국민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살아생전에 미국이란 더러운 나라는 찬양을 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생전에 저들과 똑 같은 말들을 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저더러 우리 아버지를 고업제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만든 원흉 놈의 딸을 지지하라고 하는 놈들이 있으니 기가 차고 맥이 차서 말도 안 나옵니다.


거기다가 저의 경우 아주 황당한 일을 당항 경우 두 말을 하지 못 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그놈의 고엽제 때문에 이미 십 팔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전 17살이란 나이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댈 언덕 하나 없는 몸이라 고등학교만 졸업을 하고 농사에 전염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작년 나이 41살의 나이지만 어느 여자 하나 저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는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나 주변에서 외국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권유를 받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돼지를 키우는 축산업이 주된 벌이가 되는 저로서 외국의 여자를 마누라로 맞아들이기 위한 외국 나들이는 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저에게 내린 운명은 가혹하였습니다.


구제역이 전국의 소나 돼지들을 거의 작살을 내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키우던 돼지는 모조리 멀쩡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놈의 하늘이 내린 가혹한 운명 운운 하느냐고요?


제 이야기를 마저 들으신다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전국에서 돼지고기 유통을 한다는 업자라는 업자는 거의 다 한 번씩 만났을 정도로 저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을 지경이었습니다.


거기에 돼지고기 값은 청전부지로 치솟고요.


주변 사람들과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이 부추깁디다.


이번 기회에 대지를 모조리 처분하고 외국 나들이 겸하여 색시 하나 주워(?)오라고 말입니다.


사실 제 스스로가 생각을 하였고 호기 중에 호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양돈업을 하고는 최고의 가격으로 돼지를 모조리 처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마누라를 사려고(?외국인 아내를 둔 분들께는 미안한 단어이지만 현실적이기에) 월남 아니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사실 처음엔 말이 통하는 중국의 조선족을 택하려고 마음을 먹긴 먹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건도 까다롭고 그보다도 우리나라로 결혼을 하여 온 조선족들 중에 많은 수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는 남자에게 이혼을 요구 하여 이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는 결혼을 하여 한국에 입국을 하자마자 잠적을 하여 남자들의 분통을 사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을 듣고 베트남과 필리핀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여자로 선회하였다가 종교 색이 강하지 않고 그리고 피부 색깔도 조금은 검은 편이지만 우즈베키스탄 여자처럼 이국적이지 않은 베트남 여자를 색시로 삼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또 프랑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은 활기차기도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그런 경향이 생기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무척 자유분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은 남녀들의 풍속도는 우리나라보다 더 앞서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 혹여 내 색시 될 여자도 그렇게 자유분방한 여자라 닳고 닳은 여자가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였다.




도착한 다음 날 소위 맞선이란 것을 봤다.


앞에 어떤 분의 소제 재공으로 써진 야설과 같이 정말로 집성촌의 성매매로 먹고 사는 여자들이 쇼윈도 안에서 야한 나이트드레스를 입고 지나가는 남자를 꼬드기는 것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맞선을 보는 나를 포함한 3명 앞의 건너편에 의자가 7개 나란히 놓여있었고 여자와 남자의 끝자리에 한국 중매 업체 관계자가 한 명 앉아있고 그 옆에는 베트남의 중매 업체 관계자가 앉아 있더니 베트남 관계자가 박수를 치자마자 베트남의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들과 양장을 한 여자들 7명이 떼거리로 입장을 하더니 하나하나 서툰 한국말을 섞어가면서 자기 이름과 인사를 하더니 앉았고 그러자 베트남 관계자와 한국 관계자들의 통역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첫 팀에서는 나에게 호감을 주는 여자가 없었다.


다른 남자들도 서로 눈치만 보는 그런 상황이었다.


두 번째 팀이 앞 팀처럼 자기소개를 겸하여 인사를 하는데 남자 중에 한 명이 손을 들었고 그러자 그 남자와 여자는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통역으로 대화를 하였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다.


세 번째 팀에서는 한 명의 여자가 그런대로 눈에 들기는 하였으나 자세히 보았더니 양키 피가 흐르는 튀기라 포기를 하였다.


이어 두 팀이 더 들어왔지만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그런 여자는 없었다.




한국 관계자의 나처럼 눈이 높은 남자는 몇 안 되었다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가며 점심을 먹고 나 혼자만의 맞선이 다시 진행이 되었다.


오후 첫 번째 팀에서 나보다 더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여자가 있었다.


7명의 여자가 오전처럼 자기소개와 이름 그리고 인사를 다 하고 앉아 한 여자가 나에게 느닷없이 한국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피부 색깔도 한국인에 가깝고 서툴지만 한국말도 다른 여자들에 비하여 능통한 편이었지만 다만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었다.




아침부터 본 맞선 녀들 중에 가장어린 여자는 19살이었는데 비하여 그녀는 27살이라는 맞선을 보겠다고 나온 여자들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내 나이 41살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 할 14살이나 어린 여자이기에 19살이라던 나와 22살이나 차이가 나던 아가씨에 비하여서는 부담은 조금 덜하였다.


그래서 난 경상남도 00군이라고 하였더니 자기를 아내로 맞이해 준다면 성심성의껏 살아보겠노라고 되레 자기를 선택하여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놀라 한국인 관계자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베트남 관계자가 한국인 관계자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니에무 저 아가씨 이 사람 중매 업체에 등록을 하고 수 십 명의 한국 남자들과 맞선을 봤지만 한국 남자들이 몇 명이나 관심을 가지고 찍었지만 저 아가씨가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는데 어때요?”베트남 관계자의 말을 들은 한국인 관계자가 나를 보고 말하며 웃었다.


“니에무 오늘 나와 데이트 어때요?”베트남 아가씨에게 직접 물었다.


“나이트 노 데이트 오케이”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가 O자를 그려가며 말하였다.


“오케이”하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하자


“그런 일단 데이트를 하면서 대화를 해 보시죠.”그녀와 나의 이야기를 듣던 베트남 관계자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한국인 관계자가 말하였다.




“메콩 강 들어봤어요?”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하고 대답하자


“거기 이야기하기 좋은 장소 있어요, 오케이”서툴지만 어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하였다.


“좋아요 택시?”하고 묻자


“노! 돈 많아요? 스쿠터 무서워요”양손을 잡고 오토바이를 조종하는 흉내를 내며 물었다.


“아니 나도 가까운 곳은 오토바이를 타요”하고 말하자


“오케이”하고는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그녀가 타고온 예쁘장한 스쿠터가 주차되어 있었다.


“꽉 잡아요, 아 떨어지게”그녀가 앞좌석에 올라타기에 뒤에 앉자 나의 손을 당겨 자기 허리를 잡게 하며 말하였다.


이 십 여분 이상을 달리자 거의 흙탕물이라고는 하지 못 하겠지만 우리나라 낙동강의 강물에 비하면 비교적 흐린 그런 강이었다.


강변에 도착하자 그녀는 우리나라로 치면 돗자리 같을 것을 스쿠터 트렁크에서 끄집어내어 깔더니 먼저 앉으며 옆자리를 권하였다.




“캉통핀 혹시 알아요?”안자마자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을 하며 아느냐고 물었다.


“캉통핀?”되묻자


“오케이”하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사람이름?”하고 묻자


“캉통핀? 오케이”하고 다시 말하였다.


“어디 사람?”하고 물었더니


“경상남도 00사람”하고 말하였다.


“한국에 캉 이란 성 없어요. 정말 캉?”하고 다시 물었다.


“마마가 그렇게 말 했어요”하고 말하였다.


“마마 베트남에 있어요?”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노! 아메리카 남자와 아메리카로 가서 연락 없어요”말하는 그녀의 눈은 그렁그렁 하였다.


“우리 고향 가보고 싶어요?”하고 손수건을 내밀며 묻자


“데리고 가 주시겠어요?”눈물을 닦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래 갑시다, 가요”하고 난 승낙을 하였고 그길로 다시 그녀의 안내로 맞선을 보았던 호치민의 결혼 상담실로 갔다.




몇 칠 후 그녀의 친구 몇 몇과 친지라고(니에무의 말에 의하면 가까운 친척은 없다고 했음) 하는 사람 몇 몇이 모인 가운데 정말로 아주 간소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아주 간소한 피로연을 한 후 그녀와 난 밀월여행을 떠났습니다.


후후후 밀월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바로 호텔로 밀월여행을 간 것입니다.


내가 베트남에 도착하여 묵고 있던 호텔에서 가방하고 몸만 다른 호텔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호치민에 도착을 하여 자유분방한 남녀의 모습을 보고 또 겨우 19살 된 아가씨가 결혼 그것도 국제결혼을 하겠다며 맞선 장소로 나온 것을 보고 크게 기도도 안 하였습니다.


사실 저도 학창시절에 이미 학교 근처에 있던 단골 미용실의(카트만 하였음)아줌마에게 이미 동정은 받친 상태였고 군대에 가기 전에 친구들과 사창가에 들락날락 하였고 최근에도 읍내 티켓 다방의 아가씨들과 동침을 한 적이 있었던 나로서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내 색시가 된 여자지만 자유분방한 호치민의 27살 아가씨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였다.




“저 사실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저녁은 식당에 내려가 간단하게 먹고 들어와 잠시 있자 와인에 푸짐한 과일과 간단한 안주에 촛불이 밝혀진 테이블을 호텔 종업원이 가져다주었고 그 테이블에 마주앉아 와인을 따서 잔에 따라주자 수즙은 표정으로 깜짝 놀랄 말을 나에게 하였다.


“결혼?”혹시나 하여 물었다.


“아니요 섹스”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토끼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할머니가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끝 말을 흐렸다.


난 당시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를 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난 그녀의 처녀를 앗았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이 여자가 나와 평생을 할 여자라고 생각하니 아침이 되어도 배가 고픈 줄을 모르겠었고 관광이고 뭐고 간에 온 종일 그녀와 함께 호텔에서 지내고 싶었다.


결혼에 성공을 한 사람들은 같이 성공을 한 사람과 함께 관광을 하여야 하였다.


다른 남자들의 표정도 나의 생각처럼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는 먼저 귀국을 하였고 나의 색시가 된 니에무를 비롯한 베트남의 새색시들은 두 달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한국으로 입국을 하게 되어 몇 칠 간에 든 정 때문에 흐느껴 우는 니에무을 베트남의 호치민에 두고 무거운 발길을 한국으로 돌려야 하였다.


귀국을 하고도 난 하루에 한 번 이상 꼭꼭 니에무에게 전화를 하여 목소리를 듣고서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었다.




두 달 후 니에무와 난 인천국제공항에서 재회를 하였다.


경상도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시 구경을 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에 서울에 머물면서 몇 칠을 보냈다.


물론 앞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난 니에무에게 깜짝 쇼를 보여줄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서울에서 마사지와 신부 기초화장을 시키면서 서울 구경을 하고 내가 사는 읍에 도착을 하자마자 이미 예약이 되었고 또 일가친지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까지 청첩장을 보내 둔 결혼식을 하고 제주도로 진짜 신혼여행 같은 여행을 하려고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니에무를 데리러 갔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결혼 당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길을 재촉하자 니에무가 최초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이틀을 자면서 아침 열 시 이전에 잠을 깬 적이 없었기에 난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고 달래어야 하였다.


아침도 먹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려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였다.




“니에무 놀라지 마. 오늘 도착을 하자마자 당신과 나의 한국 결혼식이 있을 거야”고속도로에 경상남도 경계선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나타나자 그때서야 말하였다


“뭐라고요? 정말?”토끼눈을 하고 나를 보며 물었다.


“자기 사진 결혼식장에 보여주고 드레스 준비도 시켰고 도착하면 신부 화장 곱게 시키려고 어제도 아래도 미용실에 갔던 거야”하고 말하자


“자기 미워 일찍 말하였으면 짜증 안 냈지”니에무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기에


“자기 제주도 알아?”하고 묻자


“교육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한국의 하와이?”말을 하고도 입을 다물지 못 하였다.


“그래 결혼식 올리고 나면 바로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하고 말하자


“뭐? 정말? 야호!”차가 흔들리도록 함성을 질러대며 환호하였다.




결혼식을 사전에 준비시킨 읍내에 도착하자 노모와 친구들과 누이동생 그리고 매제가 먼저 와 있었고 그리고 사전에 부탁을 한 이웃마을에 사는 베트남에서 시집을 온 여자 둘이 나와서 반겼다.


베트남에서 시집을 온 여자 둘이 미리 예약한 미용실로 데리고 가려하자 드레스를 먼저 보고 싶다고 하여 식장 드레스 룸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다른 드레스로 바꾼 후 미용실로 가자 나고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손질하고 다른 준비 상황도 점검을 하였다.




보통 외국 여자와 국제결혼을 할 경우 집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국제결혼이라 비용이 많이 드는 탓에)한국에서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다시 양돈업을 시작하고 나면 틈을 내기 어려울 것 같고 또 이왕 결혼하는 것 신부에 대한 베일을 사전에 일가친척 그리고 친지들과 이웃에게 공개한 후에 벗기는 것이 흥미가 있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진행 하면서도 찬구들이나 이웃은 물론이고 누이동생이나 매제에게도 사진 한 장 공개를 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살다가 결혼을 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축의금만 인편으로 보내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베일에 신부를 가려두었더니 식장은 대 혼잡이었다.


피로연을 준비 시킨 식당은 음식이 부족하여 안절부절못하며 이웃 식당에서 음식을 조달하기까지 하였다.




제주도 행 비행기 안에서도 니에무는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면 꼬집어 달라고 하면서 애교를 부렸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자 니에무가 나에게 나의 국내 결혼식이라는 깜짝 쇼에 버금가는 말을 하였다.


자기 배에 귀를 대어보라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결혼 후 신혼여행도 신혼여행 같지 않은 여행에서 니에무는 허니문베이비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차에서 니에무의 호들갑을 벌였다면 진짜 제주도 신혼여행에서는 내가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정말이지 삼박사일의 꿈같은 신혼여행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신혼여행 지에서 보낸 나의 그런 사실은 늙으신 어머니는 나보다 더 좋아하시면 빨리 신혼여행을 끝을 내고 오라고 성화가 여간이 아니었지만 신혼여행을 마치고 오는 날까지 친정인 우리 집에서 머물고 있던 누이동생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간신히 삼박사일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도착을 하였더니 우리 집 마당은 또 한 번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성화와 자랑에 이기지 못 한 누이동생이 읍내에 사는 여고 동창들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준비하여 잔치를 벌인 것이다.


잔치는 음식이 떨어지는 날까지 계속이 되었기에 니에무나 나나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앗!”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온 날 밤이 이슥하여 니에무가 사진첩의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 사진은 아버지가 월남에 파월이 되었을 때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날 밤부터 니에무는 나와 동침을 거부하였고 그리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나나 어머니는 타국으로 시집을 온 니에무가 향수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뱃속의 아기가 걱정이 되었다.




“자기야 우리 호치민에 갔다 오자”사진첩의 사진을 본 후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말을 유도 해 봤자 외면만 하고 시어머니인 어머니의 말에는 겨우 답 정도의 말만하던 니에무가 나에게 애원을 하였다.


순간 나는 국제결혼을 하였다가 실패를 한 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하나의 희생양이 되는가 싶어 아차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니에무의 말에 요한 뉘앙스가 많이 비쳤다.


우리란 단어와 갔다 오자는 무슨 뜻이란 말인가?




“벌써 고향생각에 못 참겠어?”넌지시 질문을 하였다.


“아니야 하지만 호치민에 자기에게 부여 줄 것이 있단 말이야 흑흑흑”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비행기 탑승 요금이 한두 푼도 아니지만 같이 가자고 아니 갔다 오자고 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몇 칠 생각을 해 보자고 달랬다.


니에무는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울기만 하였다.


보다 못 한 어머니가 쌈짓돈을 내어놓으며 뱃속의 아기 때문에라도 다녀오라고 하며 한숨을 쉬셨다.


돼지 판돈이 아직 많이 남았다며 어머니의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드리고 난 니에무의 고향인 호치민에 다녀오기로 결심을 하였다.


산부인과에 들러 여행을 해도 좋은가를 묻고 영양제를 한 대 맞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로 난 니에무를 데리고 다시 호치민으로 갔다.




호치민에 도착을 하자 니에무는 자기가 살던 집으로 가지 않았다.


꽃을 한 다발 사더니 시 외곽에 위치한 공동묘지 같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 무덤 앞에서더니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니에무를 따라 하였다.


그러자 꽃을 사며 모종삽을 사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니에무가 자기가 섰던 곳을 파기 시작하였다.


한 뼘도 안 팠는데 모종삽에 뭔가가 거린 것 같았다.


그러자 니에무는 옆으로 넓혀 팠고 거기에는 나무로 된 아주 자그마한 상자가 하나 있었고 니에무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상자가 묻혀있던 곳을 매웠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처음 니에무의 요청에 의하여 데이트를 한 메콩 강 강변에 도착을 하였다.




“아까 무덤 누구 무덤?”강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먼저 물었다.


“파파”하고 니에무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건 뭐?”니에무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파파 마마 사진들이야”하고 말하며 상자를 열었다.


“왜 거기에 묻었어?”다시 물었다.


“내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버리면 가지고 있을 사람 없어”니에무가 사진들을 들척이며 대답했다.




사실 앞에서도 간략하게 말하였지만 니에무는 외가 쪽으로 먼 친척만 결혼식에 참석을 하였고 아버지 쪽의 하객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도 그런 것이 이상하였지만 혹시 자존심에 관한 것이 걸린 사안이 아닌가 하여 묻지 못 하였다.




“!”난 내 눈을 의심하였다.


“캉통핀!”니에무가 내 눈앞에 들이대며 말하는 빛바랜 사진에는 놀랍게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아오자이를 곱게 차려입은 여고생 또래의 아가씨였다.


“캉통핀?”내가 니에무의 말을 따라하자


“응”하고 하였다.


강 동빈 바로 우리 아버지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이 여자는?”놀란 마음을 억제하지 못 하고 물었다.


“마마”아오자이 차림의 사진 속 여자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하였다.


“그런 이 사람과 무슨 사이?”속사포를 쏘듯이 물었다.


“마마 첫사랑”하고 말하더니


“자기 누나”다른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 사진을 한 장 집어 들더니 내 눈앞에 보이며 말하였다.


“아니 자기 마마가 우리 아버지 아이 가졌었어. 지금 어디 있어.”벌떡일어나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로 이야기하자


“12년 전에 지뢰 밟고 죽었어.”눈물을 훔치며 말하더니


“고철 줍는다고 돌아다니다가 그만 임신을 한 몸이었다든데.......”니에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였다.




니에무가 말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니에무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호치민에 살지 않고 동수안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거기에 우리 아버지가 맹호부대 일원으로 파월이 되었고 전투를 하고 돌아와 몇 칠 외박을 받고 나와서 알게 된 것이 니에무 엄마였고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나면 돌아온다고 하여 둘은 깊은 관계를 가졌고 그 후에도 전투를 하고 오면 틈틈이 만나 관계를 하였는데 제대를 하고 다시 온다던 아버지의 소식은 두절이 되었고 온다는 말만 믿고 낳은 아이를 혼자 키우다가 도저히 키울 수 없자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우리 아버지와 과거를 속이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지만 니에무 언니인 우리 아버지의 딸이 엄마 앞에 나타나자 그 남자는 엄마를 구박하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엄마는 다시 외가로 왔고 니에무도 엄마를 따라왔는데 딸 둘을 홀몸으로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호치민으로 와서는 몸을 팔아가며 살았는데 미군이 철수를 하자 다시 베트남의 남자와 동거를 하였고 자기를 낳았는데 베트남 정부가 문호를 개방하자 엄마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시정 거의 단골에 가까울 정도로 찼던 미군이었던 사람이 베트남으로 왔고 그리고 미국으로 엄마만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니에무는 외할머니 밑에서 크면서 항상 몸조심을 하라는 것이 입버릇처럼 말하였고 그래서 니에무는 엄마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순결을 지켰고 그리고 엄마를 그런 나락으로 떨어트린 남자를 만나서 욕이라도 실컷 해 주고픈 마음에서 한국인과 결혼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고 그리고 몇 년을 두고 수 십 차례 맞선을 보았지만 자기 엄마와 우리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에 경상남도 00군이란 글이 있어 그 지역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하였으나 경상남도 00군의 사람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결혼도 미루다가 나에게 걸려든 것이라고 했다.




결국 니에무 엄마와 관계를 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니에무 엄마는 미국으로 가버렸지만 희한하게도 니에무와 난 근친 아닌 근친결혼을 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사실 니에무와 나는 죽는 그날까지 비밀로 하기로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전에 니에무는 니에무가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다던 할아버지를 쏙 빼어 닮은 아들을 출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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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확하게 말하여 근친상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신분인 아이디와 닉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하신 분이 주신 제보입니다.


판단은 독자님의 목임을 아시겠죠?


또 많은 쪽지 제보 부탁드립니다.


경험이나 아님 하고 싶은 사람과 관계 및 방법을 쪽지로 주시면 제가 판단하여 쓸 수 있을 경우 그대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을 붙일 내용을 미리 말씀을 드리고 그렇지 못 한 즉 제가 쓰기에 부적절한 내용이라면 그런 것이란 회신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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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하신 분께서 특히 <왜 우리 국군둘이 월남에 파벙이 되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는가?


왜 우리 국군들이 마군들보다도 더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을 하였는가?


여러분들은 이 두 가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은 간단합니다.


미국이라는 깡패에 가까운 나라가 자국의 이득을 위하여 제 삼의 국가 군인들을 끌어들여 총알받이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누구를 규탄하거나 타도를 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미 대사관 혹은 영사관 내지는 미국과 관련이 된 것에서 미국을 규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요?


자기네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미국의 국기를 들고 반미를 주장하는 단체들 앞에서 반미 단체를 타도하자고 외치거나 미국이 자기들을 살려준 나라라고 강변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뿐인가요?


월남파병의 한국 측 괴수인 박정희 독재자의 딸인 박00씨를 고엽제 전우회 및 파월장병 전우회 고문으로 위촉을 하고 있는 지경이니 이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다 쓰러질 코미디 중의 코미디가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육이오 때 우리나라를 도운 점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굵은 소금으로 밑간을 한 안남미로(인도차이나반도의 안남이란 곳에서 생산되는 쌀로서 찰기가 거의 없어 입으로 불면 날라 갈 정도라고 함)만든 주먹밥으로 도와주었다면 가져 간 것은 최고급 양식 그도 풀코스의 양식을 슬그머니 빼앗아갔습니다.




도움이란 배려나 마찬가지입니다.


배려라 함은 도움을 주고 어떤 대가를 바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도움을 주면서부터 이미 빼앗아 갈 만반의 준비를 모조리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소파 협정입니다.


빨갱이로부터 우리 국민을 지켜주고 돕는답시고 주둔지 땅을 무료로 그도 노른자위만 골라서 주둔시키고 주둔한 병사가 살인강도 도둑질에 강간을 하더라도 재판 관활 건은 자기들이 갖는 등 악의적인 것은 모조리 자기들이 유리하도록 만들어 두고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입니까?


그들은 세계적인 깡패입니다.


집안끼리 혹은 형제끼리 다투며 사는 것이 세상입니다.


또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사움은 말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하거나 자기들의 물건이나 정책을 사가거나 따르면 상대가 아무리 착하고 정당한 조직이라도 적으로 만들어버리고는 자기들의 정책에 따르는 놈들의 대리인이 되어서 총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모조리 그런 종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열세로 들어가면 자기들을 따르는 아니 따르도록 만들어버린 나라들에게 아니 속국 아닌 속국에게 파병을 하라고 하여 자기들 대신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속국 아닌 속국 중에 가장 불쌍한 속국이 바로 대한민군이란 땅덩어리에 사는 불쌍한 우리 국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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