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

꽃말

들어와 0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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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행방

“오래 기다렸어?”

참고서에 눈을 들자 바로 눈 앞에 유미가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당장 눈이라도 뿌릴 듯한 흐린 하늘이었고 저녁무렵이라 추위는 한층 더 심해져 있었다. 유미는 교복 위에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두른 차림이었다. 갸우뚱한 얼굴에 웃음이 하나 가득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서는 추위를 타는 탓에 밖에서는 언제나 두꺼운 옷차림이었다. 아무리 안춥다고 해봐야 옷차림이 그래서야 언제나 들통나기 일쑤였다.

“미안.. 추운데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나도 이제 막 왔어”

약속시간이 약 15분 정도 지나 있었다. 유미는 평소에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유미로써는 드문 지각이었다.

“화 안났어?”

“화는 무슨.. 아니라니까”

“응 잘됐네”

큰 눈동자로 희성을 바라본채로 또다시 방긋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부셨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웃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미가 희성이에게만 보여주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미소였다.

“추..추우니까 서두르자. 오늘 중으로 문제집 끝내기로 했었잖아”

“기다려.. 같이가자니까?”

가방에 참고서를 쑤셔넣고는 도서관 입구를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희성의 옆 얼굴을 유미가 옆에서 들여다 보고 있었다.

“왜..왜그래?”

“왜 늦었는지 안물어봐?”

또 무슨 덫이려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대 유미가 이런 식으로 물어올 때는 항상 그 뒤가 있었다. 결국 덫에 걸리고 놀림을 당하거나 웃음을 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럴 때 일수록 화제를 바꾸는 편이 유리했다.

“글쎄? 뭐 동아리 애들한테 시어머니처럼 잔소리 늘어놓다가 그런 거 아냐? 이제 동아리도 은퇴했으니까 한발 빠지는 게 어때? 후배들도 이런 시어머니 같은 선배가 있으면 연습도 제대로 못할텐데..”

“음.. 뭐야? 그래? 나한테 관심도 없구나? 내가 얼마나 후배들한테 인기 있는지 몰라서 그래? 하여간에 세심한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니까.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라고”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데?”

이녀석.. 또 뭔가가 있구나…

“있잖아.. 실은 창호 있잖아.. 걔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창호? 그 2학년에? 그 창호?”

한 학년 아래의 야구부 에이스. 야구 명문은 아니긴 했지만 발군의 실력과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여자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응.. 걔가 있잖아.. 사귀자고 하더라고”

유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유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드시 희성이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유미의 자기 자랑엔 익숙해져 있었다.

“저런.. 가여운 녀석.. 야구 하나 밖에 모르는 녀석이 또 불쌍하게 유미에게 차인 남자 리스트에 오르게 생겼네.. 쯧쯧쯧…”

유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도.. 그럴까 싶어서…”

“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유미를 돌아 보았다.

“아직.. 대답은 하지 않았어.. 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거든.. 희성인 어떻게 생각해? 나.. 걔랑 사귈까?”

그렇게 질문을 던진 유미가 대답도 듣지 않고 희성을 스쳐지나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거.. 잘 모르겠어”

목소리를 낮춘 유미가 연습장을 내 밀었다.

“전에도 가르쳐 줬었잖아. 여기선.. 이 공식으로…”

“아 맞다 맞다. 고마워.. 하여간에 공부 하나는 잘한다니까..”

‘하나’라는 부분에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유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숫자와의 씨름을 이어나갔다. 유미가 동아리를 은퇴하고부터는 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이렇게 둘이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성이에게 그렇게 공부를 배우고 있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의학부를 포기한 후 생명공학 분야로 진로를 틀었었다. 희성이 W대학을 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 유미도 그 대학으로 가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어릴 때부터 지는 것을 싫어하는 유미가 희성에게 지기 싫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앞으로 한 문제!”

빨간 리본으로 묶은 검고 긴 머리카락이 오른쪽 어깨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 맑고 투명한 눈동자와 긴 속눈썹, 사랑스러운 입술까지. 초등학교 2학년 이후부터 언제나 함께였던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걔랑 사겨도 될까..?”

만약 이렇게 같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면… 이렇게 유미의 옆 얼굴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라면… 그런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유미가 다른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던 그런 미소를 다른 남자에게도 보여준다니…

“이.. 있잖아.. 유미야.. 아까.. 얘기 말인데…”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뭐야~? 모처럼 집중하고 있었는데…”

“아, 미안”

“조금만 더하면 풀릴 거 같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봐”

“미.. 미안.. 근데.. 아! 미안..”

“뭐가?”

“유미야.. 너 정말 그녀석이랑 사귈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라니까”

“어떻게 할까라니.. 어째서?”

“왜? 신경쓰여? 희성아?”

“아,,아니.. 신경쓰일 거 까지야..”

“흐음.. 그럼 나.. 창호랑 사겨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해?”

“아..아냐!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금방 대답이 튀어 나왔다.

“저기요.. 좀 조용히 해줄래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안경쓴 여학생이 짜증난다는 듯이 두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다 풀었다~ 희성아 나가자”

“유..유미야~”

유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겨들고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왓~ 추워라..”

“유미야.. 기다려봐~:

유미의 어깨를 잡은 손을 유미가 지체없이 쳐내버렸다.

“왜이래? 안치워?”

“기다려 보라니까”

가로등이 켜져 있는 어둠이 내려 있는 거리를 유미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희성은 그런 유미의 코트 깃을 잡고 멈춰 세웠다.

“아 좀 기다려 보라니까.. 유미 너 정말 그녀석이랑..”

“그만해! 신경 안쓰인다며? 그럼 희성이랑 상관 없는 일 아냐?”

“상관 없긴 하지만.. 상관 있단 말얏”

“뭐야 그게? 내가 누구랑 사귀던 말던 내 맘이잖아 안그래?”

“그..그건 그런데..”

유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유미가 휙하고 등을 돌렸다. 맞는 이야기였다. 유미가 누구와 사귀던 그건 유미의 마음이었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미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며오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희성에게 유미가 물었다.

“그런데 희성아. 아까 그 얘기.. 그거 정말이야?”

“응? 뭐?”

“내가 창호랑 사겨도 된다고 생각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해? 어느 쪽이야?”

“음.. 그건…”

가로등이 유미의 긴머리와 하얀 목덜미를 비추고 있었다.

“대답해봐..”

유미와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유미가 없는 일상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랬었는데…

“어서…”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말로 이야기 하지만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난 싫어.. 유미가 그녀석이랑 사귀는 거 난 싫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전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흑.. 흑…… 크흑”

“유,유미야..?”

울어? 당황한 희성이 유미를 돌려세웠다.

“쿡쿡쿡.. 아 재밌어... 뭐야.. 심각해져 가지고는.. 목소리. 막 떨렸어.. 하하하”

“뭐어~?”

“아 재밌어.. 정말 재밌다니까.. 후훗.. 내가 창호랑 사귈 리가 없잖아? 그런 아~까 다 거절했었다고.. 당연한 거 아냐? 희성이는 그런 것도 … 몰라? 아하하하.. 웃음이 안멈춰져..”

“뭐..뭐라고!?”

또 당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결국 여느 때처럼 유미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걸로.. 당분간 또 놀려먹을 거리를 하나 던져준 셈이었다. 무릎을 짚고 주저 앉을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오늘 너한테 저녁을 만들어 줄 사람이 누구지?”

“..유미”

“그치? 희성이 방 청소도 빨래도, 아침에 깨워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커다란 어린 애를 두고 내가 남자친구를 사귈 여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 희성이 너.. 너 혼자 할 줄 아는 거 아무 것도 없잖아. 대학도 그래.. 혼자는 외로울까봐.. 그래서 내가 같이 가주려고 하는 거잖아.. 고마워 하라고.. 정말 희성이 같은 애가 옆집에 살고 있는 덕분에 이게 뭐야.. 나만 불쌍하잖아.. 모처럼 멋진 남자한테 고백 받았는데..”

“네.. 네..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염치가 없군요 염치가..”

솔직히 말해서 안심이었다. 두껍게 내려 앉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유미는 아직도 생각이 나는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좋았어”

“응? 뭐라고?”

“아냐.. 아무 것도..”

유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입김을 호호 불고 있었다.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어? 장갑 어쨌어?”

“음.. 학교에 두고 왔나봐”

“으이그.. 정말 못말린다니까”

희성은 털장갑 한쪽을 벗어 유미에게 내밀었다.

“자.. 한쪽이라도 끼고 있어”

“아, 고마워,, 근데 그럼 희성이가 춥잖아”

가방을 오른쪽 어깨로 바꿔 매면서 맨손이 된 왼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렇게 하면 돼.. 유미도 손 주머니에 넣어..그럼 괜찮을 거야”

“그러네.. 역시 머리는 똑똑하다니까..얼굴은 별로지만”

또 시작이었다, 언제나 유미는 이런 식이었다. 하나하나 받아치자면 끝도 한도 없었기 때문에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왼손에 희성의 장갑을 낀 유미가 오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의 코트가 아닌 희성의 코트 주머니에…

“유미야..?”

“우와~ 진짜네.. 아주 따뜻해.. 미안.. 내 손 차갑지?”

희성의 손을 차갑게 언 유미의 손이 가만히 잡아 왔다.

“응? 아.. 아냐.. 괜찮아..”

“응? 뭐야? 희성이.. 너… 혹시…?”

하지만 귓볼까지 빨개져 있는 건 희성이 아니라 유미였다. 거울이나 보고 이야기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아 내었다. 대신 주머니 안에서 유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였을까.. 이렇게 유미의 손을 잡았던 것이… 아주 먼 옛날 일이었던 것만 같았다.

“자, 희성아 가자”

“응.. 아참.. 오늘 저녁 메뉴 뭐야?”

“오므라이스”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으며 참 오랜만에 유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서로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평소보다 두 사람의 말수가 많아졌다.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고만 싶었다.

‘하지만.. 좋았어..’

다 들렸어 유미야. 내가 못들었을 리가 없잖아.. 시험만 끝나면 그 때.. 제대로 이야기 할게 봄부터 같이 대학을 가게 되면.. 그 때는… 더 이상 소꿉친구는 싫어..

‘사랑해 유미야..’

희성의 고백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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